야설

여승무원, 연인, 여자 - 에필로그

야동친구 2,857 2018.06.18 16:23
<마지막 회>
세상은 평온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히 흘러가 버리는 평온한 세상의 시간 속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난 항상 울고 있다.
슬퍼서가 아니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 넘어야만 하는 균열이 있어서....
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그 곳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계속 잃어갔다.
서로 나누어 가지기를 원했던 미래도....
함께 그려나가고 싶었던 꿈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행복도....
이젠 무엇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단 하나 남은 건....
그녀를 좋아했다는 것....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
살아있다는 건...어떤 걸까....
죽는다는 건...또 어떤 걸까....
가끔씩은....
내가 살아있는 건지 죽어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무엇을 살아있다고 하는걸까....
무엇을 죽는다고 하는걸까....
무엇을 정상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미쳤다라고 부르는 걸까....
더 이상....
아무 것도....
나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혜미의 유골은 재가 되었고....
그녀처럼 불행하게 살다 간 어머니의 곁에 안치되었다.
그 재와 함께 뿌려져 사라져 버린 것은....
내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 있고....
혜미는 이 세상에 없다....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통증이 온다.
뺨을 스스로 내리쳐보면....아픔이 느껴진다.
배가 고픈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밥을 먹는다....
눈물을 흘려 베개가 촉촉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잠을 자고 잠에서 깨어났다는 증거다.
하지만...
혜미는 그럴 수가 없다.
아픔도 느낄 수 없고,
배가 고플 수도 없고,
잠도 잘 수 없고, 당연히 깨어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는....혜미의 모습을 더 이상은 볼 수가 없다....
기내에서 졸던 모습도....
조수석에 앉아 언제나 손으로 턱을 괴고…밝은 눈으로 바깥 풍경을 내다보던 그 모습도....
맛있게 라면을 먹던 그 모습도....
이젠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찾아도 그런 모습은 세상에 더 이상 흔적이 없다.
내 곁에 있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간 걸까....
이젠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직....내 마음 속에서만....
나의 뇌활동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영상 속에서만....
내가 보지 못한 그 아이의 모습은....
오로지 꿈에서만.....
그것도....매일 밤마다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난 언제나....
어디에서나....
틈만 나면 잠을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의식적으로 잠을 자는 습관이....
혹시나라도....
꿈에서라도....
잠시나마라도....
단 한번이나마 더....자주 볼 수 있기 위해서....
그 아이를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단 1초의 백만분의 1만큼의 시간이라도 좋으니....
단 한번만이라도....
단지 스쳐지나가는 모습만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 아이를 데려가버린 그 아이의 신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고 또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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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적지않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다음 해에야 난 비로소 석모도를 홀로 찾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며칠 전부터....
혜미와 함께 이 곳을 다시 찾는 꿈을 꾸고 있었다.
혜미의 영혼과 함께....
다시한번 이 곳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혜미가 나와 다시한번 함께 오고 싶어했던 그 곳을....
이제 나 홀로 찾아왔다.
펜션은 그대로였다....
이 곳에서....
혜미가 내 영혼을 구원해 주었다....
이 곳에서 뜨거운 섹스를 나누었고....
혜미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혜미 덕분에....나 스스로를 구해냈던....눈물을....
그 전에....
이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며....
혜미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혜미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향해 다가와 줄....
그런 희망을 바라고 있었다....
바로 이 곳에서....
이 안에서....
그 아이는 나를 위해 유니폼을 입고 서 있었다....
어느 새...메이크업까지 확실히 다하고선....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복장을 하고선....
그렇게 예쁜 모습으로....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앞에서 서 있어 주었다.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그 때의 혜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늘색 상의에 하얀색 스커트...
스타킹은 신지않은 매끈하고 잘 빠진 다리에 검정색 샌달형 끈이 달린 구두...
말아올린 승무원 헤어스타일에 하늘 빛 뾰족한 머리 핀에,
흰색 스카프까지 목에 두르고 있어주었다.
샤워를 하고 메이크업으로 취기를 감추었지만, 양 볼은 붉으스레한 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혜미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어떤 별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눈빛으로 눈 앞에 보이는 혜미의 모습만을 쫓고 있을 뿐이었다.
혜미가 어색한 듯 잠시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었다.
그러더니 "킥!"하는 웃음소리를 살짝 터뜨리며 고개를 들고는 내 두눈을 응시했었다.
얼굴엔 활짝 웃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양 볼의 보조개와 눈웃음.....
예쁜 유니폼과 메이크업에 어울리게 빛나고 있었다.
"이 모습이 보고 싶었어요?"
혜미가 활짝 웃으면서 내게 물어왔었다.
"응."
나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었다.
"보니까 어때요?"
혜미가 그렇게 물어왔었다.
"흠....그냥...예쁘다."
나는 예쁘다고…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우리들의 대화가 뚜렷이 기억난다....
"정말요?"
"정말로. 정말로 예뻐."
"기내에서 볼 때와는 달라요?"
"응...많이 다른 느낌이야."
"어떤게 더 좋아요?"
"둘 다...둘 다 좋아..."
"조금 전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샤워를 해도 머리가 조금 어지럽네요.
조금 헤롱거리더라도 이해해 줘요, 오빠."
"그럼....난 괜찮아...."
그럼....난 괜찮아....난....괜찮아....
어느샌가 또 눈물이 흘러 내린다…
난....괜찮아....
난....괜찮아....혜미야....
괜찮다고 중얼거려보지만....눈물은 멈추질 않는다.
혜미와 함께 거닐었던 갯벌을 걸어보았다....
보문사에도 올랐다.
혜미는 이 곳에서 무척 신이 나 있었다....
“불교에선....환생....윤회를 이야기하잖아....
나....다시 태어나고 싶었거든....
다음 세상엔....꼭 평범하게....그렇게....
엄마랑....또다시....그렇게....
다음 세상에선....남들처럼 평범하게....
행복하게....그렇게 살고 싶어서....”
남들처럼....평범하게....행복하게....
그렇게 살고 싶어서....?
혜미야....
남들의 평범함이....너에겐....너라는 아이에겐....
절을 내려와 담배를 한 개피 꺼냈다....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미안, 혜미야....
오빠 아직....담배 못 끊었어....
사방을 둘러본다.
주말이라 그런지....사람들이 적지 않다....
저 사람들은....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바쁘게 생활하다가....
휴일에 모처럼 이 곳을 찾고....여유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나는 이 곳에서....
다시 또 한 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다시 한 모금을 빨아보았다.
그 때....
절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틀림없이 낯익은 얼굴....
저 여자는....
그 여자도 내 모습을 발견하고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버린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도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이네?”
“그래....정말 오랜만이다.”
수연이....
수연이다....
이미....여러 해가 흐른 후에....
이 곳에서....이런 모습으로 만날 줄은 몰랐다.
내 시선이 수연이 곁에 서있는....
수연이의 손을 맞잡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에게로 옮겨졌다....
한 눈에 알 수 있다.
수연이의 딸인가 보다.
예쁜 자기 엄마의 모습과 꼭 닮았다.
“딸이야?”
“응.”
수연이가 밝게 웃는다.
그러면서 어리둥절해 하는 딸의 손을 꼭 잡아 보인다.
“안녕하세요!”
한 아가씨가 싱글벙글....하지만 약간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서 인사를 건넨다.
“아....!”
“수진이....기억하지?”
수연이가 웃으며 자기 여동생을 바라본다.
“그래....기억하고 말고. 너랑 나이차이가....세살이었던가?”
“그래. 기억하고 있네.”
수연이 웃는다.
예쁜 얼굴....밝은 웃음....
하지만 예전보다 웬지 약간....초췌해 보인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걸까....
“소연아, 이모한테 와....”
수진이 소연이라고 부르는 여자아이를 안고 살짝 한켠으로 물러나준다.
수진이 역시 언니처럼 예뻤다.
어릴 때는 쑥스러움을 많이 탔었다.
“결혼했구나. 뒤늦게나마 축하한다...행복하니?”
“그럭저럭.”
수연이 밝게 웃는다....하지만 다소 처량한 빛을 띄운다.
“애 아빠는?”
“외국에 있어. 일 때문에.”
“그렇구나....애가 참 예쁘네....엄마를 꼭 닮았다. 몇 살이야?”
“네 살.”
“크다....그런데 언제 들어온거야? 여전히 외항사?”
“아냐, 그만둔지 꽤 됐어. 귀국해 있어. 다른 곳에서 일해.”
“아....! 남편이랑 떨어져서 힘들겠네?”
“후훗, 괜찮아. 생이별한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수연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잠깐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건넨다.
“미안....사실은....오빠 소식 들었어....안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
“....................”
“힘들겠지만....그래도 힘 내.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그래....고맙다....”
우울함이 밀려왔다....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수진이도 직장에 다니는거야?”
“네!”
수진이 어느새 내 말소리가 들리는지 약간 큰 소리로 대답하며 웃어보였다.
“직장이 어딘데?”
“여의도에 있어요.”
“여의도? 나도 여의도에 있어. 어딘데?”
“어? 정말요?”
알고보니 회사가 서로 무척 가까웠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하지만 서로 만나지 않는다면 어찌 알겠는가…
내 명함을 건네주고 다음에 다 같이 가까운 곳에 모여서 식사라도 하자고 했다.
생활 속의 잔잔히 피어나는 에피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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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왔고....
한 달이 조금 못되는 시간동안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바쁜 것이 좋다....
바쁘게 일하는 동안에는…모든 아픔과 잡념에서 잠시나마라도 벗어날 수 있으니....
그러던 어느 날....점심 때 전화가 왔다.
수진이었다.
다같이 만나기에 앞서 오늘 저녁에 우선 자기한테 한턱 쏠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흔쾌히 약속을 정했다.
퇴근을 하자마자, 약속장소로 달려갔다.
수진이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맛있게 저녁을 먹었고, 수진이 자기가 차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분위기 좋은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수진이는 성격이 몹시 얌전하면서도 사람의 기분을 맞출 줄 알았다.
모처럼 다른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오빠!”
차를 한 모금 들던 수진이 문득 나를 불렀다.
“응?”
“음....진지한 이야기 하나 드려도 될까요?”
“응, 물론이지, 거리낌없이 이야기 해보렴.”
“후훗....!”
수진이 내 능청스러운 모습에 웃음을 띄운다.
그러다가....웃음을 거두고선....
이야기를 할까말까 하는 눈치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는거니? 오빠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울께.”
“아뇨....그런건 아니고요....”
수진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혼자서....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봤는데....
그 날 오빠랑 언니가 하는 이야기....저 사실 다 엿들었어요.
그리고....언니 표정을 보고 확실히 알았어요.”
“응? 그게 무슨 말이니?”
“언니는 미혼모에요.”
“으응?”
놀랐다....
수연이가 미혼모라니....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수진의 말이 계속 귀에 들려왔다.
“언니는 미혼모에요.
언니가 왜 소연이 나이를 오빠한테 잘못 말할까 싶었어요.
소연이는 네 살이 아니라 다섯 살이에요.”
“소연이가 다섯 살이라고?”
뭔가....이상한 느낌이 내 신경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하지만....
“남편이 외국에 있다고 하던데? 일 때문에....”
“그런거 없어요. 제가 동생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언니....임신하고서....그것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요....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고 지쳤어요.
언니는 애 아빠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았었고....
아이 때문에 언니를 좋다고 쫓아다니던 다른 남자랑 동거생활도 했었어요.
하지만....오래 가지 못했죠....
언니는 그것 때문에 더 상처 받았어요....”
“....................”
맙소사....이럴 수가....!!!
“그 날....그리고 그 날 이후....언니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서 확실히 느꼈어요....
오빠....이런 말 드리기 정말 죄송한데....
저....저 혼자 고민 많이 한건데....
언니....우리 언니 오빠 많이 좋아했었잖아요....학교 다닐 때부터....계속....
그래서....그래서....”
그래, 맞아!!!
나는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그래, 맞아....
어떻게 된건지 알겠어....
알겠어....아마도....맞을거야....!
수연아....!
도대체 어째서....
도대체 어째서....
그럴 필요 없었잖아....
그럴 필요 없었잖아....
난 뒤로 기지개를 켜면서 눈을 힘있게 감았다.
눈물이 빠른 속도로 흘렀다.
“오빠! 괜찮으세요??”
수진이 당황한 목소리로 황급히 물었다.
“그럼....괜찮아....난 괜찮아....!”
아아....!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세상 일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란 말인가....
혜미....혜미와 혜미의 어머니에게 벌어진 일이....
그 끔찍하고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
수연이에게도....
수연이와 소연이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이렇게....어리석은 일이....
어떻게 또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목이 메어왔다....
혜미야....!
혜미야....
네가 그래서....
날 그 곳으로 이끌어 준거니....?
나와....
수연이와....
소연이를 위해서....그렇게....?
눈물이 더욱 흘러내렸다....
눈을 떠보니....
수진도 나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아....인간은 어찌 이리도 죄 많은 존재인가!
이 숨막힐 듯한....
죄의 사슬은....서로 고리를 엮으면서....
어찌 이리도 반복된단 말인가....!
안돼, 안돼!
이젠 이 사슬을 끊어야만 해....!
혜미와 혜미의 어머니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어선 안된다!!!
그 후 여러 날 동안....
나는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연은 나를 피하고 있었다....
피하지 마, 수연아....
그러지 마라…
그래선 안돼…
네가…네가 무엇을 잘못한거니…
잘못한 것은 나잖아…
내가 너에게 준 그 고통을…
내가 어떻게 갚아야 하니…
안돼…이제 더 이상은 안돼…
수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제 어느 때…
그 때의 그 호텔의 그 방으로 찾아가겠다고…
거기서 다시 만나자고…
꼭 와서 기다려 달라고…
나의 죄가 시작되었던…
나 스스로를 옭메기 시작했던…
그 곳에서…풀어버리고 싶었다…
모든 것을…원점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약속의 그 날 그 시간에 맞추어 호텔로 찾아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왔을지 안왔을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하지만…
꼭 와 주기를 바래…
그 때도 그랬다…
가서 둘이 어떻게 하겠다,
하자는 약속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방에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우리 둘을 휘감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그렇다, 그 때도 그랬다…마치 지금 이 순간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약속한 층에 도착하자,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마치 그 날의 그 때처럼….
그 날의 그 때처럼 행동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또 그 날의 그 때처럼…
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이 살짝 열려 있다.
아아…!!
똑같다…
모든 것이 그 날의 그 때와 똑같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가벼운 긴장감이 내 몸을 휩싸고 있었다.
나는 가벼게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그리고 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잠그지 않았나 보다.
바로 조금 전에 열어두기라도 한걸까…
살며시 다가가…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서..
그녀가….
그 날 그 때처럼….
수연이가 그렇게 그 곳에서…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숙인 채, 볼을 붉히며 앉아 있다.
아아…돌고 또 도는 사람의 운명이여…
도저히 어쩔 수 없는걸까?
입술이 그녀에게 닿을 때마다 조금씩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는 그녀의 몸을 느꼈다.
그 날도 이랬다…
수연이는 그 날도 이랬다…
깊고 깊은 키스와...
본능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애무를 해 나갔다.
흥분과 희열과...
도저히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서로 얽히고 섥힌 채 내 온 몸과 온 정신을 휘감고 있었다.
문득 내 눈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눈망울이..
그렁그렁하게 날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눈이 그렁그렁하게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날…난 그녀의 이 눈을 피했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었던 눈….
너무나 마주 보고 싶지만, 봐서는 안될 것 같았던 눈….
아아, 눈. 눈!
그 때의 바로 그 눈이 그 후 한동안 날 얼마나 괴롭혔던가…!
그러나 이제는…
피하지 않는다…
피하지 않는다…
피해서는 안된다…!
애타게 나를 바라보는 수연의 눈을 마주 응시했다.
수연이는 그 때와 다름없이…
조금도 다름없이…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정말로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주 많이...
그녀는 정말로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수연의 그렁그렁한 눈빛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수연의 그 눈빛 속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의 눈빛이 겹쳤다…
혜미의 눈빛…
깊고 깊은…눈망울…
이젠 혜미의 눈빛이…그렇게 날 괴롭히고 있었다…
“흐흑…!!”
수연을 애무하던 나에게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흑흑흑~!!!”
터져나오는 흐느낌을 참을 수 없었다…
아아…하나님…!
수연이 손을 뻗어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준다…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하고 포근한…
따뜻한 느낌…
아아…따뜻하다…너무나도 따뜻하다….!!
이 느낌은…
이 느낌은…
나는 이 느낌을 안다…!!!
나의 흐느낌은 계속 되었고…
수연이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느낌으로….
그리고…그 느낌이…
나의 모든 죄를…
상처를 씻어주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그 따위 잘못을 반복하진 않는다.
두번 다시는 그 따위 죄를 심어놓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자기자신에게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그런 죄의 씨앗은…
다시는 심지 않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제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리고…
또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딸이 생겼다.
부모님과 가족들 모두 우리를 받아주시고…축복해 주셨다.
그래야 했기에....
우리 모두가 뚜렷이 기억하는...
그런 일이 있었기에...
또한 다시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하기에...
나는 나의 연인과 내 딸을 지킬 것이다.
혜미가 다시 내게 연결해 준...
그들의 행복을…
내 손으로 이루어주고 지켜줄 것이다.
홍콩행 비행기 안은 오늘따라 사람이 많다.
먹고 살기 위해서…
세계 각지를 마치 국내의 시장 찾듯이 찾아다니는 세상이 아닌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의 해외쯤이야 뭐…
마치 예전의 고속버스 정도로 여기게 된 듯 하다.
그런데…
그런데…
창 밖을 내다보는 듯 하더니, 어느새 고개를 돌리고선 또 뒷편을 바라본다.
돌아볼만한 일도 없는 듯 한데 말이다.
그녀는 잠시도 안절부절 못하는 듯 했다.
왜 저러는지 대충 짐작은 간다.
그녀의 다소 피곤해 보이는 듯한 얼굴을 보니 짐작이 간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그녀의 고개가 서서히 숙여진다.
어느 새 눈이 감겨 있다.
이윽고…가끔씩 고개를 아래로 떨구어가며…졸고 있다 ㅡㅡ^
아주 살며시…
코~ 잠들어 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피식~하고 미소가 지어졌다.
안쓰럽기도 하다.
어느 직업이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항공사 승무원이란 직업도 무시 못할만큼 피곤하다.
여성의 몸으로 오랫동안 서서 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시차에도 적응해야 한다.
나는 잠든 그녀를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꽤 귀여운 아가씨다.
얼굴도 매우 아름답다.
비교적 어려보이는 것이 인하공전 출신임에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아가씨는 아직 일한지 얼마 안되는 주니어가 확실하다.
남자들의 시선을 한눈에 확 끌만큼 깨끗하게 생긴 마스크가 눈에 띈다.
다소 수줍음을 머금고 있는 듯한 표정도 귀여웠다.
170이 넘어 보이는 큰 키에 몸매도 예뻤다.
요즘 애들은 갈수록 몸매가 괜찮아지고 있어…
유니폼 속에 감춰진 그 볼륨이 뚜렷이 느껴진다.
그녀의 고개가 흠칫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내 눈과 그녀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녀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면서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마치 “뭘 그렇게 쳐다보시죠? 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라며
애써 자신이 조금 전 졸았던 사실을 감추려고 애쓰는 듯이 말이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쑥스러웠을 것이다.
쑥스러워서 애써 강한 부정적인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순간 그런 그녀가 약간 당돌하다고 느껴지면서도 귀여웠다.
그런데…아주 잠시 후에…
창 밖에서 다시 시선을 옮겨 천장 쪽을 애써 응시하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자기자신은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정신이 피곤한 육체를 컨트롤 하질 못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녀의 눈이 스르르 풀린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이 한번 반항이라도 시도하듯이
흰자위를 살짝 드러내며 까뒤집힌다.
그러더니 이윽고 다시 눈이 감겨버리며 고개가 조금씩 숙여져갔다.
순간 딱한 생각이 든다.
“정말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녹초가 되어버렸네 아주…”
졸고있는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무척 편안할 것이다.
나는 계속 그녀의 숙여진 얼굴을…
그리고 그녀의 몸매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젠 가정이 있는 몸이다.
더구나 가정이 생긴지 오래되지도 않아서인지 예전 같은 어떤 흑심은 들지 않는다.
또 잠시 후...
그녀의 고개가 다시 서서히 위로 올라온다.
한순간, 이번에는 조금전보단 천천히 눈을 뜬다.
서서히 의식이 깨어난 그녀…
갑자기 뭔가 생각난듯이 또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는 눈이 내 눈과 마주친다.
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당황해서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는 모습이 역력하다.
두 번이나 조는 모습을 정면의 승객에게 보여버렸으니 몹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붉어진 그녀의 얼굴…
고개를 떨구었다가 다시 통로 쪽으로 돌린다.
그녀의 옆 얼굴과 새빨개진 귀…
당혹감과 쑥스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에서 열이 나고 있을 것이다.
쑥스러워하며 순간적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는 그녀,
그러다 눈을 다시 돌려 귀여운 눈망울로 나를 흘끔 쳐다본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내 입모양이 그녀에게 묻고있다.
“피곤하구나…?”
내 입모양을 정확하게 파악한 그녀…
아주 순간적으로 갑자기 눈물을 떨굴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하소연이라도 하듯…그렇게 말이다.
자기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다.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느낀듯이
또다시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깨어나 있는 그녀의 모습…
작고 예쁜 계란형의 얼굴…
날씬한 몸매,
긴 하체,
얼굴, 팔, 손, 다리….
드러난 부위들의 살결이 희고 곱다.
흰 손목에 차고있는 시계가 잘 어울린다.
앙증맞은 귀걸이와 메이크업…
세련된 아이다, 귀엽다.
내가 말을 건네본다.
“몇 기세요?”
“네?”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기수가…몇 기세요?”
“아!”
그녀가 순간 깨달았다는 듯이 나직이 탄성을 흘린다.
아주 짦은 순간 눈을 아래로 향하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살짝 억지웃음을 지으며 되묻는다.
“승무원들 많이 아세요??”
기수를 물어오는 승객은 거의 없다.
기수를 물어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승무원의 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네.”
나는 짧게 대답하며 자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자연스럽고 단호하게 끄덕였다.
“음…네....”
내 대답이 너무 단호하고 직설적이었을까.
그녀가 약간 당황해 하면서 또 억지웃음을 피식 지어보였다.
“친구들이 여럿 있어요. 지금 내 와이프도 승무원이었고.”
“아! 정말요??”
그녀가 비로소 알겠다는 듯이 짧은 탄성을 내뱉는다.
그러더니 이번엔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힘들다고들 그러시죠??”
뭔가 동의를 구하는 듯한 그녀의 물음이었다.
자기가 피곤하니 그런 걸 물어 보는게지,
상당수 애들은 여전히 열심히 잘하고 있단다, 얘야.
네가 아직 사회생활을 좀더 맛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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