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여승무원, 연인, 여자 - 36부

야동친구 1,639 2018.05.21 18:18
이젠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젠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
몰랐어....
몰랐어...혜미야....
난 정말 모르고 있었어....
네가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어떤 심정으로 여태껏 버텨 왔었던 건지....
난 네가....
네 깊숙히 어떤 모습을 감추어왔었던 것인지....
정말 전혀 모르고 있었어.....
한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새로운 한가지 문제가 다가온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새롭게 다가오는 문제들을 한가지씩 한가지씩 모두 처리해 버릴 테다.
그리고 혜미를 둘러싸고 괴롭히는 그 문제들을 모두 해치워버릴 테다.
그렇게 되면 혜미의 앞날은 틀림없이 조금이나마 더 밝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밝아진 앞날의 혜미 곁에는 내가 함께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혜미는…
나와 처음으로 만났었던 비행기 안에서…
또 서울에서 가졌던 재회의 순간에도…
자신의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나에게 암시를 했었다.
다만 그때는 내가 그녀에 대해서 잘 몰랐고,
그녀 역시 낯선 이에 대해 당연히 말을 돌려가면서 암시했기 때문에
더 이상 깊은 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이젠 상황이 다르다.
적어도 현재의 내게 있어서 혜미는…
나만큼이나…
아니, 어떤 면에서는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젠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젠 절대로 혜미를 홀로 그렇게…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
이젠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젠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
비둘기색 정장이 쥐색 정장보다 산뜻하고 무리없어 보였다.
와이셔츠는 엷게 빛이 나는 하늘색으로,
원색의 프린트 무늬로 넥타이를 맞추었다.
반짝이는 구두보다는 복숭아뼈 살짝 올라오는 감색 구두로 신고
양말은 바지색깔에 맞추어 회색으로 신었다.
향수 대신 여자를 곧잘 유혹할 때 쓰던 것처럼 향이 부드러운 비누로 정성들여 샤워를 했다.
여자들은 대체로 향이 부드러운 비누냄새를 풍기는 남자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법이다.
물론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은 결코 여자가 아니었지만….
자극적인 향수보다는 향이 좋은 비누가 훨씬 좋을 것 같았다.
넥타이를 조였다.
준비는 끝났다…
가자!
혜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얼굴이 더 좋아졌구나,
몸도 아울러 많이 나아진 듯 하다.
다행이다…!
이렇게 단정하고 보기좋은 널…
보기좋은 외모만큼이나 성격까지 착하고 좋은 널…
누가 그토록 못살게 군단 말이야…
그건 안되는거야…
절대로 안돼!!!
그 날 차안에서의 정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난 안돼…오빠는 날 이해 못할거야…
난…난…오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애가 아냐…
내가 얼마나 나쁜 앤지 알게되면…
오빠는 날 지금처럼 잘 대해줄 수 없을거야…”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든지…
그런건 전혀 상관없어.
널 좋아해…정말로 널 좋아해…
너도 나 좋아하잖아,
우리 둘이 이렇게 서로 좋아하는데 무엇이 두렵니?”
“난…난…오빠한테 지금까지…항상 거짓말만 해왔어…
난…엄마도 안계셔…
우리엄마 벌써 돌아가셨어…
나 어릴 때 벌써 돌아가셨어…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엄마…고아로 자라서는 그렇게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어…”
혜미의 흐느낌이 나에게 더 강하게 전달되어 온다…
나지막한 속삭임…
울먹이며 내뱉는 그 몇마디의 말 속에서 혜미의 짙은 아픔이 배어나온다…
내가 어머니에 관해서 물어볼 때마다…
주저하던…
당황하던 혜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혜미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뿐만이 아냐…
나…그것 말고도 계속 오빠한테 숨기는게 많았어…
나…항상…그런 식이야…
내 주위에 유리벽을 쌓고 살아왔어…
다른사람과 나를 구분하는 그런 유리벽을 쌓고…
오빠한테도…
오빠한테도…그랬어…”
혜미의 목소리가…더 떨려 나왔다…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힘겹게…힘겹게…
그렇게 한마디씩 가까스로 내뱉고 있었다…
이런…
이런 몇 마디의 말이 입에서 나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힘겹게 내뱉는…말들일까…
주저하지 말자…
주저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
혜미에게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손을 내밀어 혜미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혜미가 고개를 숙이고 가늘게 흐느끼고 있다.
그렇게 울 수 있도록 놔두면서…
천천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혜미야…!
그냥 오빠가 중얼거리는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그냥…어떻게 들으면 많이 생뚱맞은 이야기일수도 있을거야…
언젠가 네가 오빠 손에 쥐어줬던 기내용 땅콩 두 봉지처럼...그렇게 쌩뚱맞은...
그냥 오빠가 예전에 생각해보고…
지금도 그래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 일이거든…
오빠는 말야…
몽골의 칭기즈칸을 무척 존경해.
그사람이 세계역사상의 최대제국을 건설했던 대정복자여서 그런 것만이 아니고…
나…사실은 어릴 때 그 사람이 자신의 여자를 사랑했던 방식을 읽고 감탄했었거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 이야기 한번 해볼게.
칭기즈칸은 젊어서부터 한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어.
얼마나 수많은 싸움을 겪고 수많은 시련과 생명의 위기를 겪었을까…
나중에야 세력이 커지고 잘 나가게 되었으니, 싸우는 족족 쉽게 이겼지.
하지만 처음엔 그러질 못했어.
자기보다 훨씬 쎄고 사나운 적들을 맞아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로 도망다니기도 했고,
패전의 와중에 아내마저 두번이나…
두번 맞나? 잘 모르겠다…
어쨌든…아내마저 두번이나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갔었어.
나중에 칭기즈칸이 적군을 무찌르고 아내를 두번 모두 되찾았어.
그런데…유목민족이 원래 사는게 거칠고 종족번식에 대한 집착이 강하잖아.
적들이 칭기즈칸의 아내를 잡아가서 그냥 내버려뒀을 리가 없었지.
칭기즈칸이 아내를 두번 되찾아왔을 때마다 아내는 적군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
칭기즈칸은 그런 아내를 어떻게 대했을까?
놀랍게도 말야…놀랍게도 그냥 아이를 낳도록 내버려 두었어.
어떤 윽박도 지르지 않고 강요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렇게 낳은 아이에 대해서 어떻게 했을까?
자기의 친자식과 조금도 다름없이 자신의 아들로 정성들여 키웠대.
놀랍지 않아? 난 어릴 때 그 사실을 알고 정말 놀랐어.
그런데 칭기즈칸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칭기즈칸은 아주 간단하게 생각했던거야.
너 죽고 나 살자는 극단적인 전쟁상황에서 원수 같은 적군에게 잡혀간
사랑하는 아내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애당초 바라지도 않고 있었던거야.
그저 살아있기만 하면 하늘이 돕는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리고 아내는 끝내 살아남아 있었고,
칭기즈칸은 또 운좋게 전투에서 승리하여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되찾아왔던거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적들에게 잡혀서 끌려간 아내는 그렇게 적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칭기즈칸은 어차피 적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복수를 했고,
내가 못나서 잡혀갔던 아내는 다행히 살아남아 주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가지게 된 뱃속의 아이들은 또한 사랑하는 내 여자가 낳은 자식인데,
어차피 내 자식이 아닌가 하고 정말 너무나도 쉽고 단순하게 생각한 거야.
그리고 그런 자신의 생각을 주저없이, 거침없이 행동으로 실천한거야.
나 어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은 정말 대단하구나.
과격하고 단순무식하게 행동하는 사람 같아도,
실제로는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통이 크구나…
자신의 여자에 대해서 그냥 일편단심으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구나 싶었어…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도 그러고 싶어.
나도 칭기즈칸의 흉내를 내보고 싶어.
나도 내 여자에 대해서…
그래, 이 여자야말로 내 여자다 싶은…내가 좋아하는…
내가 정말로 마음 속 깊이, 뼛 속 깊이 사랑하는 내 여자에 대해서
나도 그렇게 내 앞에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싶어.
그리고 그런 내 여자를 사랑하고 내 여자를 지켜주고 싶어.
나…오빠는…
혜미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어떤 아픔이 있었든…상관없어.
혜미가 지금 오빠 눈 앞에 있는걸…
내가 혜미 눈 앞에 이렇게 있잖아.
혜미야, 오빠는 네가 좋아. 널 사랑해.
처음엔…진짜 미안하다…이런 말 하는거…
처음엔…널 꼬시고만 싶었어…
네가 너무 예쁘고 마음에 들어서…꼬시고만 싶었어.
오빠가…예전에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그렇게 말이야…
하지만…이젠 안 그래.
오빠는 혜미의 남자가 되고 싶다.
혜미는 오빠의 여자라고 생각한다.
너한테 예전에 고백했던 것처럼 그렇게 널 좋아하고 있어.
사랑하고 있어.
너와 같이 있기만 해도…
너무 즐겁고 기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져.
네 목소리만 들어도 너무 좋아서…
혼자서 네 목소리만 떠올려도 좋아서 혼자서 히죽히죽 웃고 있어.
어느샌가부터 그러고 있어…
내가 지금 그러고 있어.
너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네가 오빠를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어…
오빠…이제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어.
오빠…이미 예전의 내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혜미가 겪은 과거의 고통…아픔…
잊고싶은 추억…어차피 지울 수 없잖아.
그냥 과거 속에 남겨두자…
그냥 아득히 먼 기억의 저 어딘가에 묻어두자…
그리고 앞으로는 우리 둘의 일만 생각하자.
다른 생각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냥 우리 둘이 함께 있을 때의 이 설레임만 기억하자.
혜미야…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하늘만큼 땅만큼…우주만큼…
혜미가 바로 오빠의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빠의 우주야.”
혜미는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며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문득 고개를 들고서 살며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또 어느 순간에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다시 고개를 들고선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전혀 초조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이미 진심을 이야기했다.
머리 속에서 아무 계산도, 수단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마음을 텅 비우고 혜미의 표정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혜미가 내 눈을 다소…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참 엉뚱해…아무리 봐도…”
“………………”
“오빠도…참 엉뚱한 사람이야…”
“……………….”
나는 잠자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눈 속에 장난끼 가득한 눈웃음을 담고 혜미를 바라보면서.
혜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그 진지함에 마음이 끌려…매력적이야.”
어느새 혜미의 목소리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혜미의 눈물젖은 눈빛이…어느샌가….
어느샌가 그 눈빛에…웃음이 살며시 스며들고 있다.
입가에도…어느샌가…그렇게…웃음이…
“오빠 곁에만 있으면 나도 모르게 용기가 나네…”
내가 활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혜미가 따라서 밝은 웃음을 짓는다.
“나도…좋아해요.
나도 칭기즈칸처럼…오빠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 해도…좋아할거에요.”
“뭐? 너 되게 웃긴다~!!! 쿡쿡쿡쿡쿡……^^*”
그래, 혜미야…
사랑해…
사랑한다.
너는 나의 우주야.
그 날의 정경이 삽시간에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내 의식이 어느새 다시 현재로 돌아와 있다.
혜미가 그날과는 달리 너무나 밝고 침착한 표정으로 내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괜찮아?”
“그럼요.”
내 진지한 물음에 혜미가 웃으며 밝게 대답한다.
내 진지한 물음이 연이어 혜미에게로 향해진다.
“떨려?”
“아뇨.”
“두려워?”
“아뇨.”
“오빠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은거야?
”응.”
“찝찝한건 없니?”
“없어요.”
“오빠랑 같이 있으면 행복해?”
“응.”
“오빠가 널 사랑한다는거 믿니?”
“응.”
“의심없이?”
“응.”
“사랑과 의심은 한 울타리 안에 공존할 수 없어.
나도 그런거 싫어, 그렇게 해줄래?”
“응.”
“잘될거라고 믿는거지?”
“믿어요.”
“패배주의는 절대로 안돼.”
“응.”
“매일 조금씩 더 좋아지는거다?”
“응.”
그래, 혜미야…
지금 네 눈 속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
망설이는 빛도 보이지 않는다.
보기 좋아.
네 모습에 나까지 자신감을 얻게 돼.
그래, 우리 하는거다.
여기서 이제 다 끝내자.
이제 안전해지자.
두려워하지 마.
이제 다시는 그럴 필요 없어.
널 사랑한다.
오빠가 널 지킬게.
중국식 고급 레스토랑이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찾아 걸어 들어갔다.
“아빠…!”
혜미가 부르는 소리에 예약석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혜미의 아버지가 이쪽을 쳐다본다.
상당히 중후한 분위기에 건장해 보이시는구나…
인상은…확실히 고집이 있어 보이신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무서운 인상은 결코 아니다.
적지않은 풍상을 겪으신 것 같다는 느낌은 확실히 들지만…
뭔가 생각이 많은듯한 표정이다.
“그래.”
혜미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앉아계신 자리로 가까이 다가갔다.
90도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씩씩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임 재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혜미의 아버지가 웃음을 띄우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해본다…
굳은 살이 꽤 많으시구나.
그 짧은 순간에도 혜미의 아버지의 눈빛이 섬전같이 재빠르게
이리저리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살아왔을까…
분명히 느껴진다.
나도 눈치는 상당히 빠르다.
“앉지!”
“고맙습니다.”
혜미의 의자를 뒤로 당겨 혜미를 먼저 앉혔다.
정중하게 혜미에게 매너를 다하고, 나도 곧 자리에 앉았다.
“딸애한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저도 아버님에 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혜미의 아버지가 덩달아 웃지만, 표정은 어색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항상 애비가 자기를 못살게 군다고 하던가?”
“딱 그 반대였습니다. 아버님을 어찌나 존경하고 듣기좋은 말만 하는지
항상 배가 아팠습니다. 어서 뵙고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보다 질투가 더 앞서더군요.”
밝고 호감가는 웃음과 표정을 지어보이며, 넉살좋게 듣기좋은 말씀을 올렸다.
아버님도 따라 웃으신다.
“정말인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걸. 상처하고서 하나뿐인 딸애라서 평소엔 몹시 엄격하게
대하는데 말이야.”
“아버님께서 그렇게 이끌면서 길러주신 덕분에 제가 따님한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혜미의 아버지가 혜미의 얼굴을 웃으며 한번 바라본다.
혜미는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띄운채 잠자코 시선을 약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진 않고 있었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어려서부터 중국음식을 워낙 좋아해서 말이야.
그래서 젊은 사람들한테 잘 맞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곳으로 정하자고 그랬네.”
혜미의 아버지가 메뉴를 고르면서 슬쩍 웃음을 흘리며 내뱉는다.
“아닙니다.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아버님께서도 좋아하신다니 정말 다행이라고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친구가 넉살이 좋구만.”
주문이 끝나자, 혜미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딸애한테 이야길 들었는지 모르지만, 난 고아로 자라서 자수성가했다네.
젊었을 때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살아남으려고 이 악물고 허리띠 졸라매고 나름대로 동분서주했어.
고생도 많이 했다네.
젊었을 때, 그저 때로는 라면으로, 자장면 한그릇으로, 짬뽕 한그릇으로 끼니 때우면서 이 악물고 버텼어.
그때 습관이 아직 남아서…
지금도 자장면이나 짬뽕 한그릇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네.”
“네…저희 같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이십니다.”
가벼운 한담을 나누는 도중에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분위기는 그다지 어색함이 없었다.
식사를 하는 중간중간에 혜미의 아버지가 이것저것 물어오신다.
“본이 어떻게 되는가?”
“네, 평택 임씨 현감공파입니다.”
“부럽네, 나랑은 달리 떳떳이 밝힐 조상이 있으니..허허…
아버님 항렬은 어떻게 되시고?”
“3형제 중 막내이십니다. 큰아버님이 두 분이십니다.
저는 2남 2녀중 막내입니다.”
“그래…어르신들께서는 모두 건강하시고?”
“네, 큰아버님들은 건강하십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요즘 몸이 좀 불편하십니다.”
“신경 많이 써드려야겠구만…아버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는가?”
“법률 쪽에 계십니다. 고등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십니다.”
혜미의 아버지의 표정이 순간 약간 변한다.
그러더니 이내 웃음을 띄운다.
“허, 그렇군. 딸애한테는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는데.”
당연하지.
혜미에게도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혜미도 얼굴에 약간 뜻밖이라는 빛을 띄우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큰아버님 두 분도…그쪽에 계신가?”
“윗 큰아버님께서는 조부께서 경영하시던 가업을 물려받으셔서 H기업을 경영중입니다.
요즘은 정치 쪽으로 관심을 많이 쏟고 계십니다.
원래 조부께서 지역유지셨고, 그 쪽에 줄곧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둘째 큰아버님과 제 아버님은 법률 쪽으로 나가셨습니다.
둘째 큰아버님은 검찰 쪽에서 오랫동안 일하셨고, 지금은 S그룹의 법무팀 고위직에 계십니다.
그룹을 위해서 일을 능동적으로 잘 하셔서인지 고위층의 신임이 매우 두터우시다고 합니다. ”
혜미의 아버지가 퍽 놀라는 눈치였다.
“허, 집안이 상당히 대단하구만. 우리 딸애가 재주가 좋은가보군,
어떻게 자네 같은 사람과 사귀게 되었는지…허허…”
“저도…몰랐어요…”
혜미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님이랑 형제분들께서 서로 관계가 두터우시겠구만.”
혜미 아버님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원래…젊었을 때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형제분들이 서로 성격이 많이 달라서요.
하지만 연세가 드시고부터는 어르신들께서도 서로 화해를 하시고 잘 어울리시고 계십니다.
지금은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저희 형님은 아버님 계통으로 진출하고 계시지만,
저는 아무래도 그쪽으로는 재주가 없는 듯 합니다.
전 아무래도 조부처럼 기업쪽으로 욕심이 많아서인지,
그쪽으로 노력해서 나중엔 제가 스스로 회사를 차려서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버님처럼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나하나 배우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도 좋고…나보다는 훨씬 유복하고 좋은 환경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아무래도 나보다는 일찍 사회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 같군…
꿈도 있고 자기소신도 분명해 보이고…
넉살까지 좋으니…하하, 어쨌든 반갑네.”
혜미 아버님의 얼굴표정이 한층 밝아진 듯 했지만…
웬지 모르게…어둡고 우울한 기색이 조금전부터 엿보인다.
“저 잠시만 실례할께요…”
혜미가 화장실에 다녀오려는지 자리에서 일어선다.
혜미의 모습이 저쪽으로 향하더니…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조금씩 멀어져간다.
“딸애한테서 무슨 이야기라도 들은게 있는겐가?”
갑자기 혜미의 아버지가 조금전과는 다른 약간 어두운 말투로 물어온다.
나는 시침을 뗐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그냥…혹시 무슨 이야길 들은게 있나 해서…
딸애가 여러가지로 엄격한 애비에게 불만이 많을 것 같아서.”
“아닙니다. 그런 건 없었습니다. 따님은 아버님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솔직히…평소에 아버님 걱정을 이것저것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따님을 좋아해서만이 아니라…
그런 착하고 정많은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아무래도 그 성격에 반했나 봅니다.”
“그래…성격 하나는…정말 좋지…제 엄마를 꼭 빼닮아서…”
안색이 우울해졌다. 그러더니 순간 퍼뜩 정신이 든다는 듯이 나에게 말한다.
“어쨌든 오늘 만나보기를 참 잘한 것 같군…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 드네그랴.
아버님께도 딸애를 소개했나?”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예의가 아닌데….”
“저희 아버님께서 일이 많으신데다가 요즘 건강이 그다지 좋지않으셔서
아직 제대로 기회를 잡질 못했습니다.
우선 제가 따님과 정식으로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서
아버님을 빨리 만나뵙고 인사 드리고 싶은 욕심에 이렇게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따님을 저렇게 바르게 키워주셔서요.
요즘 따님 때문에 무척 행복합니다.
저희 집에서도 따님을 본다면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아버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따님과 계속 저희들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아버님께서 홀로 고생하시면서 따님을 잘 돌봐주셨던 것처럼,
이젠 제가 따님과 함께 하면서 지켜주고 싶습니다.
적어도 고생은 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젊은 놈이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좀 뭣합니다만,
지금까지는 저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저 혼자의 힘으로 벅차다면 집안의 도움도 기꺼이 청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 뭔가 어려움이 있을 때 저를 밀어줄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환경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지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을 겁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 받는 것이 사실 뭐가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속된 말로 말씀드리자면 흔히들 좋은게 좋은거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 둘의 미래를 도모해가면서 물론 아버님에 대해서도
항상 감사하는 자세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모시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혜미의 소중한 아버님이시니까요.”
마지막 몇 구절은 일부러 한 말이었다.
나에게 빽이 있으니 우리 둘 일에 함부로 간섭하지 말아주십시오,
혜미에게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뭔가 불편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쓸데없는 일만 일으키시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서도 뭔가 아버님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좋은게 좋은 겁니다….
뭐 결국 이런 뜻이었다.
다만 기분에 거슬리지 않도록…
나 혼자 내 생각을 말하듯이 자연스럽고 소신있게 정중히 예의를 갖춰
단어와 표현선택을 하면서 내뱉은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코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집안 어르신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혜미를 지켜야겠다는 각오를 세워놓았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난 내 나름대로 혜미의 아버님에게 타협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받아들이느냐 안받아들이느냐는 이제 상대의 손에 달려있다.
속된 말로 혜미 아버님은 끓여먹고 살만한 분이다.
우리집도 충분히 끓여먹고 살만하다.
그런데 우리집은 정계나 법조계, 기업쪽으로 인맥이 두루두루 넓다.
욕심많고 야심많으셨다는 지역유지였던 우리 조부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한마디로 우리집은 묵은 살림이고, 혜미의 아버님은 새살림이다.
우리집보다 기반이 약하고 세력도 약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좀 치사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만일의 경우가 벌어질 때에는 우리집이 더 우세하다.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이게 통한다.
고쳐나가야 할 나쁜 점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절대로 통한다.
독에는 독으로 맞서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어차피 혜미의 아버지가 아닌가.
억지로 무리해서 제압할 필요가 없다.
적당한 먹잇감 하나 던져 놓으면서 적당히 구스를 필요가 있다.
혜미의 아버지가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내 말이 끝나자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긴다.
이윽고 웃음을 지어보이며 내게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젊은 친구가 넉살좋고 이해타산도 빠르구만…크게 될 친구야. 허허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나도 밝게 웃음을 지으며 목례를 드렸다.
혜미가 우리 둘에게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혜미야…
내가 널 지킬게…
다 잘될거야...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