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순정 - 1부

야동친구 1,679 2018.07.24 11:30
<경험담에 픽션을 가한 것입니다.>
‘ 순정"
1부 - 회상편
-
난 사람이 사람에게 질려버린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그런 내게, 사람이 사람에게 질려버릴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연 희.
처음으로 알게 된 건 몇 년 전 중학교 2학년.
그때는 서로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고, 여차저차 하다 연락이 끊겨 한동안은 잊고 살았다.
연 희, 라고 했었다, 그녀는.
본명은 아니다. 정말 이름이 뭔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그 해 겨울에, 생애 처음 여자에게 고백을 받았다. 날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의 책임을 몰랐던 나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사랑한다고 답했다.
그녀는 곧 전학을 갔다. 연락조차 끊겼다.
외롭거나 보고싶었다기 보단 심심했다. 어차피 난 그 아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
심심한 나머지, 어느 날 학원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추운 날씨에 항의라도 하듯 하얗게 성에낀 차창을 바라보며
연희에게, 기억속의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몇 분 뒤, 답장이 왔다.
‘누구?’
그럴 만도 하지.. 내 번호를 지운 모양이다.
이름을 말하니, 바로 답장이 온다.
‘나.. 이제 한계야.’
그녀는 내게, 왜 이제 왔냐고 한다.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았다고도 한다.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순간 그녀를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걸어, 비록 목소리뿐이지만 곁에 있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 기억속의 그 아인 조금 제멋대로에 잘 삐져버리긴 해도 애정결핍은 아니었다.
나는, 무엇이 희를 그렇게나 바꿔놨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상처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한참 깊었던 것 같다.
늘 따뜻함 속에만 자란 내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값싼 동정 - 나는 자기 곁에 있어주겠냐는 희의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열여섯의 겨울, 희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연락이 끊겨버리긴 했지만, 내게 이미 여자가 있는 줄을 알면서도.
그녀는 내게 사랑을 요구했다.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동정과 연민, 그리고 가식으로 빚은 애정 뿐이었다.
희 역시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처음 내게 사랑한다 말했을 때,
돌아오지 않는, 대가 없는 일방통행의 사랑이 되어도 괜찮냐고.
그렇게 물었었다.
희는 언젠가는 나도 자기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상관없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될 줄만 알았었다.
열여섯의 철없던 나는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날 위해 몸도 마음도 다 주겠다- 고 했었다.
그 겨울이 채 지나기 전, 그녀는 내 것이 되었다.
내 첫경험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어린 소녀의 순결을 뺏는 것으로 지나갔다.
아파하던 그녀는, 내 곁에 누워 말했다.
‘오빠,’
‘응’
‘그 언니.. 돌아와도 나한테 와야돼, 나 버리면 안돼, 응?’
-버리지 말아 달라고.
‘응.’
나는 대답했다. 그리도 간단히 배신을 약속하며.
-
어느 날인가부터, 쌓였던 눈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꽃이 핀다.
봄은 겨우내 발소리죽여 다가와서는, 어느새 눈앞에 나타나 놀래키곤 한다.
떠나기 싫어하는 겨울과 비키라며 밀쳐대는 봄이 서로 실랑이를 벌이던 무렵,
나에 대한 그녀의 맹목적인 헌신과 의지는 차츰 집착으로 변했다.
장난처럼 놀리는 말에도 화를 내고, 내가 자기 말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역시 화를 냈다.
한두달 정도는 참았지만, 애정과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내 인내는 곧 바닥을 드러내 버렸다.
나는 그녀가, 그녀의 집착이 점점 귀찮아졌다.
아니.. 질려버렸다고나 할까.
문자고 전화고, 바쁜 일이 있으면 무시하는게 반복되었다.
하루는 전화를 몇 번 무시했더니 어떻게 찾았는지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뭐라고 잔뜩 짜증을 내는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어리광 들어 줄 시간 없으니까 다음에 얘기해.’
희는 잠시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날 밤, 문자가 왔다.
날 죽여줘, 라고.
전화를 했다.
왜 그러냐는 첫 마디를 뗄 겨를도 없이, 전화는 끊어지고 다시 문자가 왔다.
죽여달라고.
맨 정신으로 그런 소릴 할 자신은 없었던지, 전화는 절대로 받지 않는다.
그저 문자로 죽여달라고만 한다.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의미가 없으니까 죽어버릴 거라고,
어차피 죽을 거면 내 손에 죽어버리고 싶다고.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서투른 동정으로 상처를 오히려 벌려 놨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서툴렀던 첫경험처럼, 그녀에게 상처만 안겨줬던 나와 그녀의 인연은 끝이 났다.
-
사람들의 옷이 눈에 띄게 얇아졌을 그 무렵,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던 나는, 그때도 어떻게 하면 여자 하나 꼬셔볼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M모 온라인게임을 꽤나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내가 사랑한 그녀를 만난 것도 그 게임에서다.
그녀에게 접근한 것도 역시 처음에는 어떻게든 꼬셔보려는 의도였다. 일단 뜬금없이 결혼해 달라고(물론 게임에서) 졸라서 결혼을 해 버렸다(지금 물어보니, 그땐 내가 하도 귀찮아서 할수없이 결혼한다고 해버렸다고 한다.. ㅎㅎ).
나중에 나이를 물어보니 열세살이란다. 솔직히 정말 놀랐다. 말투만 보고 대충 내 또래겠거니 했는데, 그때 열일곱이었던 나와는 무려 네 살 차이...
그래도 나는 좀 더 키워서 잡아먹으면 되지 하는 생각에 나의 타겟 리스트에 그녀.. 아니 그 아이를 올렸다.
처음에는 분명 여러 알고 지내는 여자 중에 하나였을 뿐인 그녀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게 난 점점 호감을 갖게 되었다.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쉬지도 않고 전화를 한 날도 있었다. 매일 150통씩 서로 문자를 하고, 몇 시간씩 전화를 하고, 그러던 어느날, 난 그녀가 내게 있어 내가 꼬시고 있던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내게 있어 그녀는 세상의 어떤 여자와도 다른 어떤 특별한 존재였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확신을 가지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결국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고백했다. 사랑한다고(작업걸다가 오히려 넘어가버린.. ㅎㅎ).
한달정도 지났을까, 매번 내가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미안한 듯 고맙다고만 하던 그녀가 말했다.
‘이젠 나도 말할 수 있어, 오빠 사랑해!’
전화 너머로 받은 정말 멋없는 고백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세상을 전부 가진 것 같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헷 하고 웃어버리곤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는 한참이나 끊긴 전화를 들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 행복했다.
-
회상편이라 글이 많이 딱딱합니다.
추신: 성이 연, 이름이 외자로 희 입니다. 오해 없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