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관계: 그 빛과 그림자 1

소라바다 7,630 2019.09.06 14:31
1.
 
밤안개가 짙게 깔린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안으로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섰다.
 
“대리님, 이제 다왔는데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혜란은 옆자리에 기대어 앉은 경준을 흔들어 깨웠으나 그는 반응이 없었다.
 
“어디 세울까요?”
 
“그냥 저기 빈자리에 세워 주세요. 수고하셨어요”
 
대리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빽빽하게 들어찬 주차장의 빈 공간에 후방주차를 하고 시동을 껐다. 요금을 받아 든 기사는 자동차키와 명함을 혜란에 건네 주고, 차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대리기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11시가 넘은 아파트 단지는 정지된 화면처럼 움직임이 없었고, 그 흔한 여름밤 귀뚜라미 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혜란은 고개 숙인 덩치 큰 경준의 모습이 왠지 슬퍼보였다. 그녀는 잠든 경준을 어떻게 깨워야 할 지 난감했다. 그녀는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이 흐트러진 모습이지만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란은 양 무릎을 다소곶이 모은 상태로 앉아 타이트한 스커트 양끝을 잡고 엉덩이를 살짝 들어 밀려 올라간 스커트를 앞으로 당겼다. 자동차 뒷좌석에 오래 앉아 허벅지 반 정도까지 주름져 밀려 올라간 스커트가 펴지며 무릎 바로 위로 당겨졌다. 혜란이 다시 경준을 흔들어 깨우려는 순간 그녀는 그의 눈에 맺힌 물방울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물 방울은 아래로 떨어졌다.
 
“… 오늘이 딸애하고 애 엄마…”
 
“네?!” 혜란은 갑작스런 경준의 말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다시한번 경준의 눈물 방울이 맺히는가 싶더니 눈물이 그의 뺨에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딸이라니요?”
 
잠시 말이 없던 경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해 오늘이 애엄마가 한국에 오기로 한 날이었거든… “ 경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이었다.
 
“… 그런데… 난 공항으로 가다가 차 안에서 라디오를 통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어”
 
혜란은 경준에 말에 숨죽이고 듣고 있었다. 경준을 알게 된지 일 년이 가까와지지만 경준의 오늘 같은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경준의 업무처리 능력은 뛰어나지만 직원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이기적인 성격에 날카로운 독사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사원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평판과 달리 혜란은 그런 그의 모습이 왠지 자신의 어린시절 또래 친구들과 외모가 다른 모습에 외톨이로 지내던 기억이 그의 모습에서 투영되어 보였다. 그와 대화를 하면, 그의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그의 맑은 눈동자는 그의 내면이 선천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혜란은 그의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잘생긴 남자다운 얼굴 등으로 많은 여자가 주위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퇴근 후에도 별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알지? 동일본 대지진…” 경준의 목소리는 떨렸다.
 
“네엣?!” 혜란은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 경준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지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쓰나미… 그 지진 때 사모님…. 거기 계셨어요?”
 
“…” 경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감은 눈에서 다시한번 눈물 방울이 흘렀다.
 
혜란의 오른 손이 살며시 그의 뺨을 감싸며 엄지로 그의 흐르는 한줄기 눈물을 닦아주었다. 혜란은 그런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랐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처럼 슬픈 얼굴을 한 남자를 본 적이 없었고, 또한 남자의 눈물을 스스로 닦아 줄 것이란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경준은 혜란의 따스한 손길이 그의 뺨에 닿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극도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눈을 감은채 말을 이었다.
 
“그렇게 그날 실종되고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 애 엄마가 집이 거기… 미야기였거든… 모두들 죽었다고 하지만 난 어딘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
 
“…”
 
혜란은 지난 동일본 대지진에 사망자만 만명을 훌쩍 넘는 다는 뉴스를 본 것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경준을 위로 할 무슨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비극적인 뉴스를 볼 떄 마다 그런 일이 남의 일 같았지만 지금 눈 앞에 이 남자에게 일어난 일이 혜란은 자신의 일 같이 슬펐다.
 
경준은 그의 뺨에 살며시 닿아 있는 혜란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앞으로 당겨진 혜란의 상체를 끌어 안았다. 혜란의 가슴 상단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천천히 혜란이 자신을 끌어 안아 주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품안이 엄마의 품과 같이 포근했다. 작년 그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 이후 처음으로 경준은 편안함을 느꼈다.
 
혜란은 갑자기 당기는 경준에 의해 상체가 앞으로 무너졌다. 혜란은 그녀의 가슴 상단을 파고 드는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그를 안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경준의 얼굴이 그녀의 젖가슴에 너무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 천천히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경준이 안정을 찾았고,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혜란로 옷 매무새를 다시 매만지며 어색한 듯 주위 창밖을 둘러 보았다.
 
“차 가져가. 너무 늦었다. 더 있으면 못 가게 할 지 몰라… 아… 그리고 서류… 저기 앞좌석에 있지? 저 파란 파일이야”
 
혜란의 대답도 듣지 않고, 경준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파트 입구로 걸어갔다.
 
“괜찮으시겠어요?” 차에서 내린 혜란이 경준을 향해 말했다.
 
경준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오른손을 들어 잘 가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경준이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 본 혜란이 운전석으로 이동해 경준의 차를 타고 아파트를 빠져 나갔다. 운전을 하는 동안 혜란은 경준의 마지막 말에 머릿속이 혼란 스러웠다.
 
‘더 있으면 못 가게 할지 몰라’
 
 
 
기태는 최근 새롭게 준비 중인 아이템의 홈쇼핑 방송 문제로 오전내내 담당 피디와의 전화 통화로 피곤해서 점심 생각도 나지 않아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데 자신의 휴대폰으로부터 들리는 카톡 소리에 책상 위에 아무렇게 놓여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을 켜보니 카톡 알림소리와 함께 혜란에게서 온 메세지가 떴다.
 
[오빠, 오늘 그거 선그라스 갖고 와봐. 써보고 안어울리면 나 안할거야]
 
그리고 연이어 메세지가 들어왔다.
 
[근데.. 모델료 받으면 나 줄거지? ㅋㅋㅋ]
 
기태는 방송피디와의 스케줄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나던 화를 식히고 있었는데, 겨우 설득해서 하기로 한 모델 문제로 또 열이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하든 잘 구슬려서 시키려고 꾹 참고 답장을 보냈다.
 
[ㅎㅎㅎ 걱정마. 선글라스 너무 잘 어울리니까… 오늘 꼭 갖고 갈께 ㅎㅎㅎ]
 
[알써. 그럼 이따봐]
 
[기분도 꿀꿀한데 이쁜 표정으로 사진한장 보내봐 ㅎㅎ]
 
[근데 왜 꿀꿀래?]
 
[해]
 
기태는 기다리는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잠시후 혜란에게서 사진이 한장 들어왔다. 혜란이 윙크를 하며 목이 넓은 티의 한쪽을 잡아 당겨 드러난 한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며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얇은 핑크색 브라끈이 그녀의 하얀 어깨를 타이트하게 조이고 있었다.
 
[ㅋㅋㅋ 꿀꺽]
 
[어때? 섹시하지 ㅎㅎ]
 
[응, 노브라로 한장만..]
 
[또또.. 시작이다]
 
[제발..]
 
[어휴… 못살아. 애기 젖 먹여야 된단말이야!]
 
잠시후 혜란에게서 다시 사진 한장이 들어왔다. 가슴을 내밀며 찍은 사진엔 얇은 티셔츠 위로 젖이 불어 커진 가슴의 윤곽과 유두 자국이 드러나 보였다.
 
[근데 너 요새 가슴 많이 커졌다 ㅋㅋ]
 
[모유 먹여서 그런가봐, 바로 지워!!!]
 
[ㅋㅋ… ㅇㅋ 생유]
 
[그럼 이따 봐.. 일찍와]
 
[ㄱ래ㅔ 바이]
 
기태는 엉덩이를 쭉 빼고 눕듯이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머리위로 들어 혜란의 사진을 보고 웃고 있었다.
 
“박 과장, 뭐해?”
 
!!!
 
깜짝 놀란 기태가 휴대폰을 꼭 쥐고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보니 입사 동기였던 경준이었다.
 
“아.. 그..냥 쉬고 있어. 언제 왔어? 잘 되가나 감시 나왔냐?”
 
“점심 안 먹어?”
 
“어.. 먹어야 지. 배가 안고파서.. 그냥 …”
 
“오다가 회사 입구에서 법무팀 직원에게 들었는데 중국지사 설립 거의 다 됐다 하더라. 이제 선발대만 가서 사업하면 되겠던데…”
 
“응, 거의…”
 
“뭐야, 그럼 너 가는 거야? 결정됐어?”
 
“아직… 이제 곧 되겠지” 기태는 내심 바라고 있었다.
 
“너, 이번 선글라스, 혜란씨 씌울거라면서…”
 
“응, 모델료로 50만원정도 책정 되있더라구. 혜란이한테는 20만원이라고 하고 띵길라구. 크크크”
 
“야! 인간아, 믿냐? ”
 
“믿을거야. 안믿는 것 같으면 10만원만 더 주면서 띵길라고 했다고 하면돼… 크크크”
 
“아유~ 이 독사, 근데 혜란씬 몸매가 좋아서 의류모델도 괜찮을텐데.. 이참에 수영복이나 란제리 기획한번 해봐라 ”
 
“야! 애 낳고 많이 불었어”
 
“지난 주말 니네 백일잔치때 보니까 살 다뼈져… 똑같던데… 오히려 원숙미까지… 옛날 처녀때보다 훨씬 더 섹시하던데..”
 
“넌 혜란이 볼때마다 항상 이뻐해줘야돼. 니 때문에 내 와이프 니 밑에 있을때 얼마나 고생했냐?”
 
“고생은 무슨… 너하고 있을때보다 내 밑에 있을때 제대로 일 배웠지”
 
자기 와이프 이쁘다는 데 기분 나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실이 그랬다. 혜란은 처녀 시절보다 몸무게는 더 늘었지만 다리가 길고 비율이 좋아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오히려 더 볼륨감 있어졌다. 기태는 희죽 웃으며 과거에 혜란이 경준의 팀에 있을때, 그와 자주 혜란의 이야기를 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 자신과 같은 직급으로 혜란의 직속 상관인 기태의 동기, 경준 역시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을 기태는 알고 있었고, 당시 기태는 두 사람 사이가 무척 신경이 쓰였었다.
 
하지만 이제 혜란은 어였한 자기 마누라가 됐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둘사이에 승리자는 자신이라는 우월감에 기태는 정복자의 권리를 누렸다. 기태는 단어의 의미를 혼자 다르게 상상하며, 경준이 어떻게 해석하든, 그를 슬며시 놀리듯 말하곤 했고, 그러면 경준의 대답이 그를 살짝 흥분 시켰다.
 
“그래? 내 밑에 있을때 보다 니 밑에 있을때 더 좋았을까?”
 
“당근이지. 내가 너보다 뭐든 잘하잖아. 하하하”
 
기태는 혜란과 경준사이에 어느 정도의 신체적 접촉이 있었을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인지 알지 못했다. 기태는 너무 알고 싶었지만 경준에게 물어보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에겐 현실이 중요했다. 그녀를 차지한 것은 자신이라는 성취감에 도취됐다.
 
기태는 언제나 뭔진 모르지만 자신에게 운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런 믿음이 언제나 그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 믿음은 성장하면서 자신감으로 이어지며, 취직도 그렇고 , 또 혜란을 만난 것도 정말 운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내노라하는 명문 대학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에 위치한 4년제 대학을 적당한 성적으로 평범하게 졸업했고, 운 좋게 서울에 위치한 대기업의 자회사에 한번에 취직이 된 그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고, 키가 크거나 멋지게 잘생기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단지 그는 그의 아버지 사업이 잘 풀려 어렸을때부터 여유있는 넉넉한 생활을 하였고, 그런 이유로 항상 물자 풍족한 생활을 해온 터라 모든 면에 욕심이 별로 없고, 느긋했다. 그것이 어쩌면 당장 취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을 없애주어 일이 잘 풀렸는지 몰랐다.
 
기태가 회사에 취직할 때만 해도 새로운 환경에 잔뜩 얼어 있어 실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업무에 적응이 되었고, 첫번째 기획한 상품이 운좋게 매진이 되었고, 이후 두 번 연속으로 전량 매진되는 아주 특별한 행운이 그를 통신판매 상품기획자로서 자리잡게 만들어 주었다. 그와 함께 입사한 동기들 모두가 그런 그를 놓고, 희안하고 신통한 놈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이후엔 매진을 기록한 상품은 없었지만 대박상품을 기획했던 터라 어느 정도 상품성이 있는 제품을 배정받아서 선방울 하는 정도의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특별히 외근을 나가지 않는 날은 IMF 이전의 기성세대처럼 무료한 오후 시간을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고 한가롭게 컴퓨터 고스톱을 치거나 다른 직원이 주위에 없는 틈을 타 성인사이트를 검색하는 등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 곤 했다.
 
기태는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맘에 걸려 회사 전산실에 혹시 직원의 컴퓨터를 감시하거나 직원의 인터넷 검색을 모니터링하는 지에 대해 에둘러 물어봤으나 그러지도 않거니와 그럴 능력도 안된다는 말에 그는 안심할 정도로 소심한 면도 있었다.
 
“자, 나가자. 오랜만인데, 내가 밥 살께” 경준이 기태를 재촉하며 말했다.
 
“오케이”
 
기태와 경준이 늦은 식사를 하러 사무실을 나갔다.
 
 
 
혜란은 신규 상품이 들어간 브로우셔를 직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외근 중인 빈 책상들에도 빼놓지 않고, 브로슈어를 놓으며 다니고 있었다. 어렵게 구한 직장이라 작은 일도 그녀에겐 소중하게 다뤄졌다.
 
기태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와보니, 못보던 한 여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큰 키와 비율 좋은 체형이 동양인 답지 않는 몸매 덕분에 멀리서도 바로 눈에 띄었다. 그녀가 그에게 왔을때, 그는 어정쩡하게 인사를 했고, 받아 든 새 브로우셔에 바로 시선을 파묻었다. 그녀가 뒤돌아갈때, 기태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가 그녀의 잘 발달된 골반을 더욱 풍만하게 보이게 했고, 그녀의 콜라 병 같은 몸매가 아주 잘 드러나는 타이트한 하늘색 스트라이프가 있는 흰 셔츠와 역시 타이트한 진한 곤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가고 난 후 기태는 동료들에게 그녀에 대해 들었다. 기태가 지방 공장에 출장을 간 어제가 새로 채용된 인턴의 첫 출근날이었고, 인턴들 중 단연 돋보이는 그녀는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민2세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첫만남 이후, 기태는 그녀와 오래 이야기를 나눠 보지 못했지만 간간히 그녀와 마주칠때면 그녀의 쾌활한 성격 덕에 인턴 사원인 그녀가 오히려 먼저 말을 걸어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기태는 그녀의 유창한 한국말 때문에 그녀가 아르헨티나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대리인 기태의 직책이 나이 서른보다 더 노총각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그녀는 기태와 네살 차이인 스물여섯의 매력적인 아가씨로 회사내에서 남자 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어느날, 회사 전체 회식이 끝나고 2차로 을지로 2가 지하의 큰 호프집에서 기태 일행이 다같이 앉을 넓은 자리가 없어 삼삼오오 찢어져 앉을 수 밖에 없었을때, 기태는 우연히 그녀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많이 친해졌다. 비록 혜란은 인턴이었지만 기태는 자주 그녀를 동료들과 퇴근 후 갖는 조촐한 자리에 초대했고, 쾌활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그녀는 거의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남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혜란이 인턴으로 근무한지 6개월여 지나 그녀가 정직원으로 채용되며, 기태의 상품기획1팀에 배정되었다. 그녀는 너무 기뻐 회사 동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녀 앞에 서 있는 기태를 끌어 안으며 기뻐했다.
 
그녀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어렵게 구한 직장에서 지난 2년간 고생했지만, 회사의 부도로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가, 기태의 회사에서 스패니쉬 특기자 특별인턴프로그램에 응시하여 합격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정확한 일처리 능력을 좋게 본 회사는 그녀를 정직원으로 만들어주었다.
 
갑작스런 혜란의 포옹에 기태는 당황하여 얼굴이 새빨개 졌고, 그녀가 다가오며 끌어 앉는 순간 그녀가 사용하는 향수가 그의 코를 자극하여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가슴이 기태의 가슴에 짓눌리는 그 찰나의 시간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기태는 그 순간 혜란이 자신을 그녀의 남자로 선택했다고 혼자 착각을 했다. 기태는 혜란이 기태 옆에 있는 기태의 입사동기 한 대리에게도 같은 포옹을 했고, 나머지 직원들 모두에게도 스킨쉽을 하는 것을 본 순간 그 착각은 바로 깨져버렸다.
 
그래도 기태는 혜란이 제일 처음 자신을 먼저 안았고, 그녀의 포옹하는 세기가 다른 사람들 보다 자신을 더 꽉 안았고, 나중에 점차 다른 직원들에게는 형식적으로 한손으로 안으며 친근함을 표현하는 정도였다고 생각했다.
 
혜란은 정직원이 된 인사 소식에 너무 기뻐 자신도 모르게 그만 앞에 있는 기태를 끌어 안고 좋아했지만, 순간 기태의 어색한 몸짓과 표정에 바로 옆에 있는 한 대리를 포옹했고, 다른 직원들과도 차례로 스킨쉽을 했다. 그녀의 몸에 밴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는데 그런 스킨쉽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혜란도 어색함을 느꼈다.
 
 
 
“혜란씨, 나 지금 나가는데 개발2팀 한 대리에게 올 하반기 출시 예정 품목 자료 받아서 내 책상 위에 놓고 퇴근하세요. 내일 아침 일찍 검토 후 이사님께 보고 해야 되니까 잊지 말고 꼭 부탁합니다.”
 
“…네…, 부장님”
 
혜란은 부장의 지시에 살짝 긴장되었다.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한대리와의 대화는 항상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혜란이 김부장의 지시로 사무실에서 나가는 모습을 기태는 자리에 앉아 보고 있었다. 혜란과 한 팀에서 근무한 후로 기태는 혜란의 이름이 불려지거나, 혜란의 목소리가 들릴때면 자동으로 귀가 번쩍 뜨였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이 되었다. 혜란이 나가고 그녀가 없는 사무실을 둘러보니 꽃이 다 시들어버린 정원같이 생기가 없어보였다.
 
“안녕하세요?”
 
혜란이 들어오는 문 옆에서 개발2팀의 직원이 복사를 하다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하는 혜란을 봤지만 그냥 하던 일을 계속했다.
 
“송 선배님, 안녕하세요. “
 
“네, 안녕… 혜란씨, 혜란씨 덕분에 개발1팀 분위기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풋..”
 
입사 2년차가 되어가는 송하선이 약간 비꼬듯 말을 했다. 사실 혜란이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선은 사내에서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남자들은 회식자리나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는 더 젊고 생기 발랄한 혜선은 공주 대접을 하고, 보다 편안한 하선은 그들과 같은 남자 취급을 했다. 그 점이 하선을 질투나게 만들었지만, 선천적으로 모나지 않은 그녀는 더이상 모질게 혜란을 대하지 안았다.
 
“아니에요.. 선배님. 무슨 말씀을…”
 
“그래요. 혜선씨,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무슨 일로…?”
 
“네, 한 대리님… 좀… 뵐려는데 안계시네요.“ 혜란은 방을 둘러보며, 한대리의 빈자리를 확인하고 말했다.
 
대리님? 대리님, 외근 중인데… 근데 밖에서 바로 퇴근 하실거라고 하던데…”
 
“네-에?”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네… 부장님께서 대리님에게 자료 받아서 책상위에 두라고 하셔서요… 내일 아침 일찍 보신다고…”
 
“그래요? 대리님이 직접 하시는 자료면 어딧는지 잘 모르는데… 가만 있어봐요. 대리님께 전화해볼게요.”
 
“네, 고맙습니다.”
 
하선은 수화기를 들고 마치 ‘나는 한 대리와 아주 친하다’ 라는 듯 혜선은 모르는 경준의 핸드폰 번호를 능숙하게 눌렀다. 잠시 후 경준이 전화를 받았다.
 
“대리님, 여기 혜선씨가 와서 자료를 달라고 하는데요. 부장님께서 시켰다고… 무슨 자료에요? 제가 찾아…”
 
“하선씨, 그거 하반기 출시예정 품목자룐데… 그거 내가 갖고 있는데…”
 
“그래요? 그럼 어떡하죠? 이메일로 보내주실 수 있어요?”
 
“혜선씨 바꿔봐”
 
하선은 자기 선에서 해결하여 혜선에게 답을 주고 싶었으나 한 대리의 말에 수화기를 혜선에게 주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한 대리님, 안녕하세요?
 
“혜란씨, 그 자료 내가 갖고 있는데... 프린트 물이라 이메일론 안되고… 내일 주면 안되나?”
 
“아..그게… 부장님께서 내일 아침에 일찍 보신다고 꼭 책상위에 두고 퇴근하라고 하셔서요…”
 
“알았어. 그럼 좀 있다 내가 전화할테니까 저녁 먹고 회사에서 기다려. ”
 
“네, 알겠..”
 
혜선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혜선이 사무실로 돌아 와 보니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하고 있었고, 기태가 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혜선씨, 가자”
 
“저..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대리님 먼저 가세요.”
 
“왜? 무슨 일 있어요?”
 
“부장님께서 시키신 일이 있는데 한 대리님 기다려야돼요”
 
“왜? 한 대리 왜?
 
기태는 한 대리라는 말에 동기지만 순간적으로 경계심과 경쟁심을 느꼈다. 기태는 혜선과 한 대리가 단둘이 갖는 시간을 원하지 않았다. 순간 질투가 치솟아 오름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게 한 대릴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혜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기태와 혜선, 둘 사이가 여느 연인처럼 사귀는 사이도 아니니 뭐라 말할 수 도 없었다.
 
“… 그럼 한 대리는 언제 오는데?”
 
“글쎄요. 잘 모르는데… 저녁 먹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걸로 봐서 한 두시간은 걸리지 않을까요?”
 
“내가 전화해볼까?”
 
“아니요. 괜찮아요. 대리님이 왜요? 그냥 먼저 퇴근하세요.”
 
“그럼 같이 저녁먹자. 어차피 저녁 먹어야 되잖아”
 
“아니에요. 그냥 대충 떼우면 돼요”
 
“자.. 가자. 거기… 순두부집 가자. 빨리 나와”
 
기태는 혼자 결정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혜란에게 재촉했다. 사실 기태는 이렇게 또 한번 혜란과 단 둘이 식사를 하게 되어 좋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혜란은 일은 잊어 버리고, 기태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저녁식사를 사준 보답으로 혜란은 기태가 극구 말리는 데도 기어이 근처에 있는 탐엔 탐스에 들러 라떼 두잔을 사서 기태에게 한잔을 건냈다.
 
“오늘 식사 맛있게 먹었어요. 대리님.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뵐께요”
 
“커피 고마워. 근데 내가 같이 기다려 줄 수 있는데…”
 
“아니에요. 한 대리님 언제 오실지도 모르고…”
 
“알았어. 그럼 수고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내가 총알처럼 달려갈테니까..하하”
 
“네, 알겠습니다. 대리님”
 
돌아서는 기태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뒤돌아보니 혜란이 회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동그란 힙 때문인지 뒷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설마.. 아무 일 없겠지, 회사에 경비아저씨도 있고, 야근하는 직원들도 있을텐데… 설마…에이 설마…’
 
기태는 머리를 흔들며 이상한 상상을 지우려 애썼다.
 
따르릉….
 
혜란이 사무실로 돌아와 책을 읽으며, 한 대리를 기다린지 두어시간이 지나 전화가 걸려왔다.
 
“감사합니다. 오로라쇼핑 개발1팀 이혜란입니다”
 
“어? 아직 있네”
 
“아..네.. 대리님”
 
“아직도 한 대리 안왔어?”
 
“네…”
 
“뭐야? 이때까지 혼자 기다리고 있는거야?”
 
“가만있어봐. 내가 한 대리한테 전화해볼게. 금방 전화해줄게”
 
기태는 말 끝나자마자 혜란이 제지할 것 같아 바로 끊고, 핸드폰에서 저장된 한 대리를 찾아 눌렀다. 신호음이 짧게 울리더니 연결이 안되 메세지로 넘어간다는 통신서비스의 안내멘트만 들렸다. 여러번 다시 걸어봤지만 메세지로 넘어갈 뿐 이었다.
 
‘뭐야, 이자식.. . 전화기가 꺼져 있나?‘
 
기태는 혜란에게 전화를 걸어 한 대리가 전화가 안되니 그냥 집에 가라고 말해줄 참이었는데 기태의 전화기에 이혜란이라는 이름이 뜨며 혜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기태는 혜란이 회사 전화가 아닌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 것이 사적으로 가까운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대리님, 저 지금 나가요. 한 대리님하고 통화됐어요.”
 
“그래? 전화 안받던데… 어디가는데?”
 
“충무로에 계신데요. 그 쪽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자식… 자기가 갖고 오면되지. 혜란씨, 그렇게까지 해야돼?”
 
“어차피 제가 할 일이에요. 어쨌든 이제 서류 받아서 다시 놓고 가야죠.. 뭐”
 
“너무 늦었다. 내가 가줄까?”
 
“아휴~ 아니에요. 금방 해결하고 퇴근하겠습니다. 대리님, 푹 쉬시고 내일 뵐께요. 감사합니다.”
 
혜란은 택시를 타고 빠르게 한 대리에게로 갔다. 조금전 그에게 걸려온 그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 되던 터였다. 10시가 넘은 서울 시내가 주초라서 그런지 빠르게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도로 주변의 쓰레기를 정리하고, 퇴계로 일대의 상점들의 불이 하나 둘 껴졌다. 잠시 후 혜란을 태운 택시는 극동빌딩 옆 골목에 혜란을 내려 놓고 떠났다. 혜란은 경준이 전화로 일러준 대로 그가 있는 술집 앞으로 가니, 말끔하게 차려 입은 웨이터와 대리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술에 취한 듯 흐트러진 경준을 그의 차에 태우고 있었다. 혜란이 다가가자 웨이터는 혜란 임을 확인하고 경준에게서 받아 둔 두툼한 서류 봉투를 건넸다. 그리고 혜란은 막 떠나려는 경준의 차를 멈춰 세우고, 차에 올랐다. 
 
 
계속...
 
오래전에 이 글을 쓰다가 멈췄었는데 얼마전부터 다시 이어쓰기 시작해서 완료하였습니다.
많이 읽어 주시고 격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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