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인도에서 만난 남자 - 27부

야동친구 2,091 2018.03.29 18:40
인도에서 만난 남자 27
"Freedom!!"
열린 문을 뒤로 하고 나는 오래전 뇌리에 남의 대사를 허공에 외쳐본다.
일행들은 나를 보고 웃더니 손가락을 귀에 대고 뱅글뱅글 돌린다.
그래 나 제 정신이 아니다.
****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황폐해져 간다.
기차가 철로를 따라 소음을 내며 달려갈수록 차창밖에 보이는 푸른빛의 수목들이 적어져 가고 검붉은 토양만 드러난다.
중간중간 간이역에 기차가 설때마다 케이에게 다가가 주위를 맴돌지만 케이는 짜이잔을 들고 눈을 감은채로 담배를 핀다.
그의 표정에서 다가갈수 없는 완고함을 느낀다.
그의 완고함에 괜히 흡연욕만 들끓어 올라 담배를 피우려니 탈칵탈칵 불꽃만 튀어 오르는 것이 가스가 떨어졌나 보다.
내 얼굴로 불이 다가와 담뱃불을 붙이는 것을 도와준다.
"Thank you."
불을 붙여준 사람을 얼굴을 바라본다.
맙소사.
나보다 좀 작은 키에 금발에 파란눈 듬직한 어깨. 외국인 대합실에서 부터 은근히 날 따라 다니던 프랑스 남자다.
혼자 심심해 보이던 그가 붙인 말 몇마디를 받아준 것이 실수였다.
알아듣지도 못할 프랑스풍의 영어를 쉬지않고 재잘대는 그는 담배를 피러 갈때도 화장실에 갈때도 날 따라 다닌다.
"저 사람 아저씨에게 제대로 꽃힌것 같은데요?"
은혜가 웃으며 상황을 정리한다.
일행들은 웃으며 잘해봐라며 응원을 한다. 이사람들아. 지금이 그렇게 응원을 하고 있을 상황인가?
누가 이 사람 좀 말려줘.
어이 형님들 그렇게 능글거리고 있지만 말라구요.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이렇게 친한척 해오는 사람에게 차마 싫다고 할 수도 없고
단지 친한척 하는 이사람에게 "나 그런사람 아닌데요?" 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지금은 괜찮지만 새벽에는 모래바람이 심할겁니다. 주무시기 전에 창을 닫고 주무시도록 하세요."
케이는 일행들에게 그렇게 잠시 주의를 주고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잠을 청한다.
케이에게 물어볼 말이 정리되지 않은채 입안을 맴돌고 프랑스인은 친한 척 뭐라고 뭐라고 말을 이어나간다.
안그래도 사진 때문에 머리 복잡해 죽겠구만 이거 무슨 업친데 덮친 꼴이냐고.
제기랄.
***
"허걱..!"
잠결에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눈을 떠 초점을 맞추니 아주 눈에 익은 백인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어젯밤 나를 고뇌하게 했던 프랑스 남자다.
입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의 입에서 나온 언어는 내 귀로 해석이 되어지지 않고
그의 심상치 않은 눈빛만이 내 온 신경에 경고를 해준다.
온몸을 긴장하고 강한 거부의 몸짓을 보여줄 태세를 갖춘다.
"자이사메르에요. 준비하세요."
나지막한 케이의 목소리가 프랑스 남자 뒤로 들려온다.
"응?"
어느새 날은 어슴프레 밝아 있고 일행들은 짐을 싸다 말고 나를 보고 "하하하" 하고 비웃는다.
어이. 이보시게들. "픽" 도 "풋" 도 아닌 "하하하"는 너무 노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셔?
기차에서 내려 역을 나서니 케이가 역앞 주차장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더니 한곳을 향해 반가운 손짓을 하고는 일행을 이끌어 간다.
"이 짚을 타고 숙소로 갈겁니다."
케이가 일행들을 둘러보고 나서 설명을하고서 가방을 짚위로 올려 놓는다.
짐칸에 꾸역꾸역 앉아서 우리는 우리를 스쳐 멀어져 가는 풍경을 감상한다.
역앞에서 아직 행선지를 결정하지 못한듯 서성이고 있는 프랑스인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뭐 저리 노골적으로 손을 흔들어 주는데 무시하기 힘들어서 나도 마주 손을 흔든다.
친절은 고맙지만 이제 보지 맙시다란 의미를 강하게 실어서.
"헤헤. 인호 아저씨 프랑스 남자에게 먹히는 타입인것 같아요."
"저사람 취향이 독특한 거지."
은혜와 형오형님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약을 올린다.
"좋았어요?"
은영씨의 묵직한 한방이 나를 침몰시킨다.
현정이가 똥그란 눈으로 나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본다.
제기랄.
****
"인호 너 얼굴이 좀 안 좋아 보인다?"
형오형님이 걱정스레 샤워를 하자 말자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누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청재형님이 내 이마를 짚어보더니 열이 조금 있는것 같다며 약을 건넨다.
"이거 직빵이야. 특별히 약국에서 조제해 가지고 왔어."
약을 먹고 자리에 눕고 천장에 매달려 돌아가는 선풍기를 보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이제 당신은 천천히 잠이 듭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인호야 우리..."
멀리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형오형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타는 갈증으로 눈을 떴다.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불쾌하다.
숙취인양 머리 한쪽이 무겁다.
"형오형님? 철재형님?"
방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저녁때 낙타 사파리를 가기로 했기 때문에 임시로 정한 누추한 방이라 창문이 없다. 방이 어두컴컴하다.
스위치를 더듬어 찾아 눌러 보아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선풍기가 멈추어 있는 것이 제기랄. 정전인가 보다.
문을 열고 나가려니 밖으로 잠겨있다. 아까 형오형님이 뭐라고 한것 같은데 문을 잠그고 나간다는 말이였나 보다.
제기랄.
***
사막이라더니 물은 그런대로 잘 나오는 것 같다.
땀에 젖은 몸을 물로 씻어내니 나름대로 상쾌하다. 두통도 조금은 가시는 것 같고.
단지 이 어두움이란..
"람 람 사떼. 람람....."
엉? 이게 무슨 소리야?
다시 주의깊게 귀를 기울려 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을 즐기려니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람 람 사떼. 람람 사떼해. 람람 사떼. 람람 사떼해. 람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이게 무슨 소리야?
샤워실을 박차고 나가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몸이 허하니 별 헛소리가 다 들리는 것 같다.
대충 몸을 닦고 옷을 걸치고 침대에 올라서서 선풍기를 손으로 돌려본다.
선풍기가 천천히 돌아간다.
혼자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별 잡생각이 다 떠오른다.
이쁜이. 케이. 그리고 사진.
내게 절대로 털어놓지 않은 이쁜이의 과거에 한발 다가설 실마리가 잡힐 듯 하다.
이쁜이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케이라는 사람을 아냐고 물어보고도 싶지만 망설이듯 울듯한 이쁜이의 얼굴이 겁이난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타를 켜 불을 붙인다.
"풋.."
이 생경한 빛깔의 라이타. 기차에서 만난 그 프랑스인이 준 라이타다.
갑자기 푸른눈의 큰 눈동자가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좀 내가 과민하게 반응했지?
잠시 혼자 실실 거리다 다시 케이와 이쁜이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골치가 지끈 거린다.
뭔상관이야. 과거잖아.
난 아내의 과거에 민감하게 구는 그렇게 속좁은 남자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려 노력을 한다.
무심코 떠올린 이쁜이의 환한 얼굴과 시원한 케이의 얼굴.
쩝. 잘어울리는 구만. 이제 서서히 탄력을 잃어가는 나와는 달리.
제기랄.
이놈의 담배 언제 다 탄거야?
난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
잠결에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우리나라 말이 들리는것 같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니 문고리가 끼리릭하는 소음을 동반한채 돌아간다.
문으로 다가가려는 찰라 문이 열리며 형오형님의 얼굴이 퍼져 나온다. 저 뒤에 보이는 찬란한 빛은 후광인가?
문을 열고 있는 형오형님을 밀치고 밖으로 급히 나간다.
찜통같은 방안과 달리 시원함이 느껴진다.
어두운 방안과 달리 빛이 나를 황홀하게 한다.
나는 두손을 머리위돌 들어 외쳐본다.
"Freedom!!"
눈을 감고 해방의 기분을 음미하는데 사방에서 비웃는듯한 픽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분후 낙타 사파리 간데요. 빨리 준비하고 나오래요."
은혜의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내 고막을 두드린다.
"지금 몇신데?"
"두시 오십분요."
그말에 나는 형오형님과 철재 형님을 노려본다.
"아침먹으러 가신담서요? 식사를 너무 오래하신것 같은데요?"
"그게.."
책망하는 나의 눈을 무시한채 철재형님과 형오형님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묵묵히 짐을 꾸린다.
"시간없어요 빨리요."
은혜는 짧게 재촉하고는 로비로 나간다.
툴툴대며 짐을 대충꾸리고 로비로 나가려니 형님들이 천쪼가리를 하나 내민다.
"이게 뭡니까?"
"그거 스카프."
"남자가 무슨 스카프를 해요?"
"케이가 사막에는 모래바람이 거칠다고 준비하라고 하던데?"
흠. 그래도 나름대로 미안한감을 감추려고 신경을 쓰긴 하셨군.
뭐 몸 안좋다고 푹쉬라고 방해 안한걸지도 모르지.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그래도 일행이라고 챙겨준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몇시간동안 날 감금해둔 만행은 잠시 넘어가기로 했다.
"이리와 내가 가게 주인에게 스카프 하는거 배워왔어. 해줄께."
형오형님이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준다.
못이기는 척 스카프를 하고 짐을 매고 로비로 나갔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날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왜?
곧이어 사람들이 웃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날보고 웃는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나도 좀 알면 안되겠니?
"핑크색이 묘하게 색정적인데요?"
짜이를 마시고 있던 케이가 싱글거리며 한마디를 던진다.
핑크색?
"뭐 취향이야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그 터번하는 방식이 여자들 방식인것 같은데요?"
은혜가 뒤이어 말을 던진다.
여자들 방식?
반항기 처자들은 아까 가게 주인에게 그렇게 배웠네 어쨌네 아면서 픽픽거리고있다.
뒤를 돌아보니 사건의 원흉인 쳘재형님과 형오형님은 배를 잡고 뒤집어진다.
저사람들이!!
현정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빠 그런 취향이었어요?"
현정이의 직격탄에 나는 서서이 침몰해간다.
흠.
지대로 당한건가?
내손이 슬그머니 머리위로 올라가 스카프를 벗기고는 주머니에 구겨 넣는다.
여기서 화를 낼것인가 아님 웃으며 넘어갈것인가?.
잠시 여행에 취해서 잊고 있었지만 나는 노련한 삼십대의 사회인이다.
"하하. 낙타나 타러 가죠?"
제기랄.